[제주 올레길 3코스] 3-A코스를 걸으며 인생을 배우다 (1) (tistory.com)
[제주 올레길 3코스] 3-A코스를 걸으며 인생을 배우다 (1)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무작정 걷겠다고 찾은 제주도 첫날부터 비가 쏟아졌다.아무래도 오늘은 안 되겠다 싶어 카페에 가서 제일 유명하다던 메뉴 하나씩 주문하고 비를 감상했다. 계획은 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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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3코스 이야기 1탄에 이어 2탄이다. 보통 한 포스트에서 이야기가 끝나는데, 이렇게 길어진 걸 보면 정말 올레길 중 제일 긴 코스 답다는 생각이 든다.
3-A코스 중간지점에서 죽어가던 남편을 두고, 먹을거리를 찾아 나선 내게 오아시스 같았던 즐거운 편의점. 정말 주변 레스토랑, 카페 문 연 곳이 어디에도 없어서 당황스러웠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이 편의점만큼은 열려있었다. 사장님은 연휴기간이지만 다리가 아파 어디 가기 힘들다며 매장에서 성경필사를 하고 계셨다.
수분을 채워줄 포카리스웨트와 당을 올려줄 아몬드빼빼로 1상자를 들고 남편에게 뛰어 올라갔다. 남편은 확실히 당이 떨어져 있었나 보다. 급하게 먹더니 이제 좀 살 것 같다고 한다. 오늘 문을 열어주신 편의점 사장님께 너무 감사했다.
남편이 이제 움직일 수 있겠다해서 편의점으로 내려가서 사장님께 감사 인사드렸다. 사장님은 더위 먹어 그렇다며 당신이 앉던 자리를 남편에게 내어주셨다. 선풍기 바람을 가장 강하게 틀어주시고는 좀 쉬라고 하신다. 우리가 앉아 쉬는 동안 제주로 내려오셔서 생긴 에피소드를 이야기해주시기도 하고, 렌트 광고 붓글씨도 써달라고 하셔서 열심히 써드렸다. 배터리가 없었는데 사장님 덕분에 충전도 덤으로 했다. 마음 따뜻한 사장님 덕분에 다시 걸을 힘을 얻었다.
아직 10km를 더 걸어야 하는데 해가 진다. 근데 뷰는 끝내준다. 비가 와서 늦게 걷기 시작했고, 상급코스를 우습게 보는 실수 덕분에 몸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멋진 한라산은 볼 수 없었겠지. 악재가 호재일 수 있다. 멋진 풍경에 별안간 또 걷자 다짐하고 남편과 걸었다.
손에 닿을 것만 같았던 보름달은 또 어떻고. 달이 저렇게 크다고? 노을은 하늘을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하늘에 멋진 그라데이션은 아픈 다리도 잊게 했다.
하늘에 수놓은 구름들은 솜사탕을 뜯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예쁜 깃털 같기도 했다. 보기만해도 멋진 풍경을 걸으면서 천천히 감상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드디어 바다가 가까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바다 위에 뜬 보름달은 나에게 수고했다며 주는 금메달 같았다. 금보다 더 반짝이던 달은 바다도 금빛으로 물들였다.
이젠 포기할 수도 없다는 걸 깨달은 남편은 너털걸음으로 앞서 걸었다. 달을 따라 걷는 해안길은 역시나 멋졌다. 끝없이 펼쳐진 해안길을 따라 걷는데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가끔 트럭만 쌩쌩 우리 옆을 지났다. 빠르게 어두워지는 길을 걷다가 정말 너무나도 멋진 일몰을 감상할 수 있었다.
입을 다물기 어려웠던 풍경. 해가 저어기 뒤로 숨는데 사진에도 다 담기지 않던 풍경이었다. 이렇게 예쁜 풍경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이미 주변엔 사람이 꽤 있었다. 저 목장에 있는 말들은 이렇게 드넓은 바다를 매일 보겠네 생각하며 셀카도 찍고 한참을 감상했다.
왼쪽엔 바다위를 밝히는 보름달이, 오른쪽엔 아름다운 일몰 풍경이. 양쪽을 번갈아보며 다시 걸었다. 달은 밤이 되니 자신을 더 뽐내며 바다 위를 금빛으로 밝혔다. 이젠 정말 깜깜해졌다. 가로등과 보름달에 의지하며 저 멀리 보이는 표선포구를 향해 걷는데, 남편과 나는 신기루 아니냐며 오늘 갈 수는 있을까 의심했다.
더 이상 걷기가 힘들어져 남편에게 못 걷겠다고 했는데 그 고통을 이겨내면 괜찮아진단다. 택시 불러 집에 가고 싶다던 남편은 이젠 정말 고통을 느낄 수도 없다며 쉬지 않고 걸었다. 이젠 사진을 찍을 힘도 없고, 가로등이 없는 길은 으스스하고 무섭기까지 했다. 한참을 걷다 만난 배고픈 다리는 바닷물이 차서 신발, 양말을 벗고 다리를 건넜다. 엄청 차가웠던 바닷물은 뜨거워진 발바닥을 식혀주어서 한편 즐거웠다. 이렇게 죽을 만큼 힘들어도 사소한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게 인생인가 보다 했다.
남편은 친구를 잃는 코스라 했다.(ㅋㅋㅋ) 본인과 함께와서 다행인 줄 알라며. 친구와 함께 걸었으면 친구와 절교할 수 있는 코스라고 하는데 한참을 웃었다. 포구에 상점 불빛이 조금은 더 가까워졌는데, 어두워진 올레길을 걷기란 쉽지 않았다. 나무가 우거진 길을 지나는데 이 야밤에 야생동물이 나오진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정말이지 남편이 함께 걷지 않았다면 진작에 포기했을거다.
우리의 우둔함이 만든 이 위험한 올레길.. 가로등이 점점 많아지고 밝아진 올레길을 보니, 드디어 끝이 보이는 것 같다. 1km 정도 남겨둔 시점에서 남편에게 난 더 이상 못 걷겠다 얘기하고 근처 롯데리아로 들어갔다. 시원한 에어컨바람과 아이스크림이 또 걷게 했다. 인간은 정말 단순한 동물.
이젠 정말 마지막이다. 표선 해수욕장에 도착하니 물이 가득 차있어 모래사장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어두운 바다를 밝혀줄 예쁜 조명과 잔디만 남았다. 이제 진짜 끝이구나.
20시 45분. 종점에 도착하니 사진 찍을 힘도 없다. 오후 2시쯤부터 걷기 시작했으니 약 7시간을 걸었던거다. 걸으며 만난 사람들, 풍경들, 그리고 남편과 나누었던 대화들. 저 날은 왜 우리가 3-B코스를 걷지 않았을까 후회했는데, 글을 쓰는 지금은 3-A코스를 걸었던 것에 후회가 없다.
인생도 그렇겠지. 밝을 때가 있고, 어두울 때가 있겠지. 더 이상 못걷겠다 싶을 때도 서로 의지해서 걷다 보면 이렇게 종착지에 와있겠지. 너무 힘들면 곁을 내어주는 공간에서 쉬어가면 또 걸어갈 힘이 생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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