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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에너지/무작정 걷기

[제주 올레길 21코스] 홀로 걸어보기, 초보자 코스 추천

by 경험부자 2024.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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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호기심이 많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해봐야 직성이 풀린다. 새로운 도전을 할 참이면,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기분이랄까. 어느 책을 읽다가 발견한 제주 올레길.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도 언젠간 하고 싶었던 나는 '그래, 이거다!' 싶었다.

한몇 주간은 망설였다. 비행기 타면 1시간이면 도착할 거고, 그냥 4-5시간 걷다 오는 게 뭐 그리 결단이 필요한 일이라고... 근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망건 쓰자 파장이라고 움직이지 않으면 그냥 집에만 있다가 끝날 것 같은 두려움이 마구 와서, 그냥 일어났다. 배낭 하나에 필요해 보이는 것 몇 개 주섬주섬 챙겨놓고, 오늘 출발하는 제주행 비행기를 덥석 예약했다. 

날도 좋고 예뻤던 하늘

공항에 도착해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에 하룻밤을 머물 게스트하우스도 예약하고, 제주올레앱에서 올레 패스포트도 샀다. 코스 다 완주해서 언젠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리라 생각하면서. 처음으로 렌트카 없이 제주 뚜벅이 여행을 시작했다. 

도착해서 공항버스를 타고, 올레길 21코스 출발지점과 가까운 곳에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배낭하나에 홀로 걷는 길이라, 맘 편히 느긋하게 걷는데 나를 환영하기라도 하듯 세화해변엔 예쁜 무지개가 펼쳐져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비가 약하게 오길래 '내일도 비가 오면 어쩌지' 하는 내 염려를 듣기라도 한 듯 무지개가 활짝 웃고 있었다. 

세화해변 무지개

당장이라도 해변에 들어가 수영하고 싶었지만, 젖은 옷으로 게스트하우스에 입장할 수도 없으니 바라보기만 했다. 물은 참 깨끗해보였고 검은 돌과 맑은 바다가 너무 잘 어우러졌다. 아름다웠다. 해변가에 앉아 포장해 온 회덮밥을 먹으면서 바다를 바라보는 일이 이렇게도 행복하다니. 

곧 어두워질 것 같아 얼른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해 방을 배정 받고, 사람들이 들어오면 씻을 수도 없을 것 같아 미리 씻고, 책 한 권 꺼내서 읽다 보니 잠이 들었다. 내일 아침부터 걸을 예정이니 서둘러 잠을 청했다. 

"처음 걸으세요?"

다음날 아침, 해물죽을 든든하게 먹고 속으로 화이팅! 할 수 있다! 를 외치면서 지도를 따라 21코스 시작점을 찾아갔다. 처음이라 패스포트 도장은 어떻게 찍어야 하지 허둥지둥하고 있는데, 안내소 직원분이 나오셔서 물어보신다. 그분을 따라 안내소로 들어가니 너무 시원하다. 혼자 올레길 처음 걷는다 하니, 지도를 보여주시면서 설명도 해주시고, 리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며 혼자 걷기에도 너무 좋은 길이니 안심하라 하셨다. 

지미봉은 20분이면 가니 꼭 올라가서 멋진 풍경을 감상하라고도 하셨다. 사실 나는 당일치기로 올레길을 걷고 다시 돌아와야지 생각했던터라, 공항과 가까운 올레길 중에 초보코스를 골랐고, 그게 21코스였다. 누군가가 제일 아름다운 코스 중 하나라고 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혼자 왔다고 손수 기념사진도 찍어주시고, 음료수도 하나 챙겨주시며 응원해 주시는 직원 아주머니 덕분에 마음이 한껏 따뜻해졌다. 

21코스 뱃지 (3천원), 올레뱃지 (3천원)

올레길 열심히 오른거 티 내야 하니까 배낭에 배지도 사서 달았다. 이제 진짜 준비 끝. 

올레길따라 표시된 리본!

아주머니가 저기 파란, 빨간 리본만 따라가면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래서 리본만 보고 한 손엔 지도앱을 켜고 걸었다. 올레앱은 내가 올레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경고음이 울려서, 길치인 내게 너무 도움이 됐다. 

길을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너무나도 멋진 풍경들. 

비 온다더니 날씨 너무 좋았다. 평일이라 걷는 이도 없어서 혼자 노래를 흥얼대며 걸어가는데 멋진 풍경에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황홀했다. 조그만 동산을 넘고, 밭들 사이를 지나치고, 집들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해안길이 펼쳐졌다. 9월이지만 날이 더워서 등엔 이미 땀이 범벅이었다. 그래도 시원한 바람이 계속 불어주어서, 뜨거운 볕도, 온몸에 땀도 이겨낼 수 있었다. 

중간지점 스탬프 (코스 중 유일하게 엔틱스러운 올레말이어서, 사람들이 종종 몰라보고 지나친다고 한다)

그렇게 걷다보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중간지점에 도착했다. 이땐 아직 힘든 게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벌써 중간지점이라니 나 걷는데 소질 있네 생각했다. 

너무 예쁜 바다를 만나면, 잠깐 배낭을 내려두고 한참 앉아서 바다를 보기도 했다. 중간 중간 만난 해변에서는 정말 배낭 던져두고 수영을 하고 싶었는데, 일단 완주는 해야지 다독이며 참아냈다. 

한참을 걷다 뒤를 돌아보는데 이렇게 멋진 풍경도 보였다. 거의 모든게 평지여서 걷기에 어렵지 않았고, 풍경 감상하다 걷다 쉬다 하다 보니 지도상으로는 종료지점이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지미봉

가라는 데로 계속 걷는데 눈앞에 산이 보였다. 아.. 지미봉을 지나가라고 했는데.. 풍경이 예쁘다고 했는데, 산으로 가는 오솔길을 걷는데 괜히 겁이 났다. 바다는 어디로든 도망칠 데가 있는데 산으로 가는 이 길은 정말 사람도 한 명 안 보이고, 이상한 사람이라도 마주치면 어떡하지 싶었다.  

지미봉 입구

지미봉을 올라야 하는데, 입구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뱀이라도 나오면 어떡하지, 이상한 사람이 산 속에 있진 않을까, 온갖 잡념이 들 때쯤 안내소에서 "20분이면 올라가요. 꼭 올라가서 풍경을 조망하세요." 했던 아주머니 말이 떠올랐다. 그래 20분이라고 했으니까 가보자. 용기를 내어 가보는데, 생각보다 가파른 경사에 온몸에 땀이 줄줄 흘렀다. 

가는 길은 초록나무가 뒤덮여 너무 예뻤는데도, 감상할 새도 없이 그냥 미친듯이 올라갔다. 나중에 정상에 올랐을 때쯤엔 정말 다리가 후들후들했다. 

이제 정상인가 거의 다온건가? 할 때쯤 정상이다. 정말 딱 20분 걸렸다. 

지미봉 정상

예쁘긴 하다. 산, 바다, 구름 모든 게 조화로웠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도 나는 안전하게 내려가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헐레벌떡 지미봉을 내려오자마자 보이는 카페로 들어가 생수를 사서 벌컥벌컥 마셨다. 식은땀인지 땀인지 모를 땀이 비 오듯 했고, 화장실로 가 세수를 했다. 얼굴은 땀범벅인 데다 열이 올라 붉어진 얼굴을 식히며 카페에 앉아 휴식했다. 이제 종료지점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돌담길을 지나니 다시 보이는 해안길. 

이제 다왔을까 싶더니 정말, 드디어 종점에 도착. 해냈다. 9시 반 경에 출발해 도착하니 거의 2시였다. 4시간 정도 걸었나 보다. 너무 뿌듯했다. 

종점에서 조금 더 걸어 종달리마을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버스를 타고 보이는 풍경들이 너무 아름다워 시간이 있었다면 해변에 내려 수영이라도 했겠지만, 시간이 빠듯해 공항으로 바로 돌아갔다. 정말이지 기억에 남을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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